전력 주파수가 50Hz. 60Hz 로 된 이유
오늘날 전 세계에서 사용하는 전력주파수는 다소의 차이는 있기는 해도, 50Hz 내지60Hz 로 각 나라마다 통일되어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파수는 처음부터 일정한 정책 이라든지 설계의 기초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현재 미국에서는 60Hz가 채용되고 있지만 표준은 일정한 것이 좋기 때문에 새로운 발전소를 만들 때부터 60Hz하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상용화 초기에는 다양한 주파수가 사용된 것이다. 원래 전기가 실용화 된 것은 1882년 에디슨이 직류 전기로 전등을 밝힌 것이 처음이다.
직류로 공급하기 시작한 전력 공급이 교류로 변환하기 까지 사정과 전원 주파수를 50Hz 나 60Hz로 되기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짚어보기로 하자.
1. 전력 공급은 직류 송전으로 시작
백열전구의 발명자로 유명한 에디슨이 우수 것은 그가 백열등 전등은 전등 시스템의 한 가지 요소 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발전기, 송전 간선, 급전선 병렬 배전 시스템의 실현 등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에디슨은 전구는 발전기의 전류에 적당해야 하고, 발전기는 전구가 필요로 하는 전류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시스템적으로의 착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전구의 연구는 그 못지않은 재능을 가지고 있던 당시의 발명자가 잊혀 버린 것은, 단품의 연구에 그쳐 전등 시스템을 도입하기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도 한다.
이렇게 완성 된 에디슨 전기조명 회사는 1882년 9 월 4일 뉴욕시 펄 스트리트에 중앙 발전소를 건설하고이 지역의 백열전구에 처음 전류를 공급 한 것이다. 발전기의 규모는 115 ~ 120V의 전압에서 850A를 공급할 수 있는 것으로, 1200 개의전구를 점등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고장이 많았고 발전기가 하루 종일 운전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러한 직류 송전 시스템은 직류 발전기의 효율을 높이고 어느 정도까지 진행 한 시스템은 있었지만, 중요한 단점을 안고 있었다. 그것은 직류이기 때문에 전압을 증가시킬 수 없었고, 도선, 케이블에 따라 배전 비용이 높아지는 것이었다.
배전 반경 1 마일 (약 1600m) 이상이 되면 송전이 어렵게 되어 버리기 때문에 장거리 송전은 축전지 없이 수행 할 수 없었다. 그 방법이라는 것은 1000V 이상으로 발전기로 부터 얻어진 직류는 상당한 거리를 송전된 후 (고전압이므로 비용 감소) 직렬로 연결 한 축전지에 전력을 공급하는 것이다. (변전소)
전지에 충전 된 후, 발전기에서 분리하여 배급망에 적합한 낮은 전압으로 하기 위해 병렬로 연결하여 전력을 공급하는 것이다. 런던 츄루시 전기 공급 회사는 이 방법으로 약 40 년간 전력 공급을 실시했다.
2. 교류 송전 시작
패러데이가 전자기 유도 원리를 발견하고도 반세기를 지난 후 무렵에 교류 변압기를 이용하여 경제적인 송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실현 한 여러 사람의 연구자들이 있었다. 프랑스 골라르(Gaulard, Lucien)와 영국의 깁스(John D. Gibbs), 헝가리의 지뻬루 노후스키, 및 브라티, 델리 등의 기술자들이다.
또한 이무렵 미국의 웨스팅하우스는 교류 송전에 강한 관심을 보여 스탠리의 연구를 지원하고 웨스팅하우스의 전등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등용했다. 영국에서는 페런티도 교류 배전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마침내 교류 배전 시스템은 융성의 조짐을 보여 온 것이다. 1880 년대 후반에 들어가면 에디슨의 직류 배전 시스템은 교류 배전 시스템에서 매우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다. 소위 전력역사상 유명한 교직 송전 논쟁의 시작이다.
3. 전력 공급을 둘러싼 교직 송전 논쟁
그것은 최초의 저전압 직류 및 단상 교류의 백열등 시장을 둘러싼 경쟁에서 비롯하여 직류로 할 것인가. 교류로 할 것인가 , 전기 기술자는 크게 두 진영으로 나눠엇다. 직류를 지지 한 사람들은 영국 켈빈 경, 크롬프턴, 홉 킨슨등이 있으며, 이에 백열등 시스템의 완성 자인 에디슨이 결합 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 페란 티, 고든, 톰슨, 미국 웨스팅하우스, 테슬라 스타인메츠들은 교류 방식을 지지 했다.
직류 지지자들을 좌절하게 된 것은 송전 비용 문제 이었지만 교류의 지지자들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아직 실용화되는 교류 전동기가 없는 것이었다.
또, 교류는 직류보다 높은 전압을 사용하므로 감전으로 인한 부상 또는 사망을 방지하기 위해 회로를 절연하고 접지 할 필요가 있는 것부터, 이 문제의 대처에 대한 대책을 촉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박한 과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교류 전동기의 개발을 촉진하고 아울러 교류의 보급을 촉진 하고 교류 시스템을 우열한 고지로 이끌어 갔던 것이다.
4. 에서 시작된 상용 주파수 교류가 사용된 초기의 주파수는 높은 쪽은 133 1/3Hz 에서 낮은 쪽은 25Hz까지 8 종류 정도의 주파수가 사용되고 있었지만, 이것은 설계자가 백열전구, 변압기, 아크 램프 ,유도 전동기 기타 부하의 특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주파수를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장치도 점진 변화했기 때문에, 주파수는 점점 혼란 상태에 있었다.
한편, 교류 전등은 미국의 하우스 톤이 133Hz 부근에 사용하도록 공급 한 것이 시작이다. 133Hz 라고 하는 것은, 꼭 이렇게 계획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기의 극수와 회전수와의 관계에서 백열전구의 깜빡임을 줄이기 위해 선택된 주파수이다. 그런데 1890년 이후가 되면 점차 변압기와 유도 전동기가 실용화 되어 주파수 별로 크게 만드는 것이 곤란 하게 되어 왔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1890 년경부터 수력 발전에 의한 장거리 송전이 시작되었다. 이를 통해 먼 곳에 전력을 수송하려면 주파수가 높으면 전압 강하가 커지므로 가능한 주파수를 낮게 하는 것 같은 생각이 생기고 있었다. 1895 년에 나이아가라 폭포 시설로 나이아가라 제 1 발전소가 완성 했지만 이 때 발전소의 기사 장 포브스는 주파수를 16 2/3Hz 로 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웨스팅하우스의 기술들은 331/2 Hz를 바랬다. 이 낮은 주파수는 전력 수송에 잘 적합했던 것이다. 결국 두 중간 주파수 인 25Hz로 결정했다.
5. 50Hz, 60Hz가 많아졌다
1900 년경 이 되면서 웨스팅하우스를 비롯한 제조업체, 전기 사업자는 두 기준으로 결정되는 움직임을 보여왔다. 송전과 큰 전동기에 대해서는 25Hz를 공급하고 더 넓은 목적의 시스템을 위해서는 60Hz를 공급 하자는 것이었다. 그 후 원동기에 대해서 고속 터빈이 도입 되고 점차 60Hz로 향하는 경향이 가속 되었다. 왜냐하면 이로 인해 저속의 왕복 증기 기관의 경우보다 극수가 적은 발전기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은 주파수의 표준화에 그다지 무리는 없었다. 라고 하는 것은 저속 발전기의 사용이 권장된다.
때문에, 133Hz와 같은 높은 주파수를 파는 것은 곤란했기 때문이다. 또한 25Hz 같은 낮은 주파수에 적응회전 변류기는 아직 널리 사용되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독일은 일정하게 주파수 기준을 50Hz로 하였다.
영국의 사태는 여전히 혼돈 상태였다. 제 1 차 세계 대전 이전의 경향은 다양화에 있었고 표준화가 아니었다.
런던이 이런 경향의 선두에 서 있었다.
예를 들어, 뉴캐슬은 40Hz , 크래스고 25Hz하는 식으로 다른 것이었지만, 제 1 차 세계 대전 이후 계속 이대로는 불편함이 생기므로 통일하는 법률로 50Hz를 표준 주파수로 하게 되었다.
처음에 25Hz를 선택한 이유는 송전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나중에도 25Hz가 남아 있던 이유는 직류를 얻기 위한 회전 변류기가 25Hz 가 아니면 잘 운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또한, 전등은 100Hz 등의 것이 좋은 것이지만, 주파수가 커지면 임피던스 강하가 많고, 긴 고압선은 물론 배전선로서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50Hz,나 60Hz 가 되었다.
출처 : https://www.jeea.or.jp/course/contents/01103/
白熱電球の発明者として有名なエジソンが優れていたのは、彼が白熱電球は電灯システムの一要素であるとの考えをもっており、同時に、発電機、送電幹線、給電線、並列配電システムの実現などにも格段の関心を寄せていたからである。
つまり、エジソンは電球は発電機の電流に適応しなければならないし、発電機は電球が必要とする電流の性格を与えることが重要であるというシステムとしての着想をもっていたのである。
電球の研究では彼に劣らない才能をもっていた当時の発明家が忘れられてしまったのは、単品の研究にとどまり、電灯システムを導入するに至らなかったからだとも言われている。
こうして完成したエジソン電気照明会社は、1882年9月4日ニューヨーク市のパールストリートに中央発電所を建設し、この地域の白熱電球に最初の電流を供給したのである。発電機の規模は、115~120Vの電圧で850Aを供給できるもので、1200個の電球を点灯させる能力をもっていた。しかし、はじめは故障ばかりで、発電機が一日中運転し続けることは不可能であった。これらの直流送電システムは、直流発電機の効率を高め、ある点まではうまく進行したシステムではあったが、重要な欠点を抱えていた。
それは、直流であるがゆえに電圧を高められず、導線、ケーブルによる配電の費用が高くなることであった。配電半径が1マイル(約1600m)以上になると送電が困難になってしまうので、長距離送電は蓄電池なしでは実行できないと考えられていた。その方法というのは、1000V以上で発電機から取り出された直流は、かなりの距離を送電された後(高電圧なのでコストは減少)直列につないだ蓄電池に給電する。(サブステーション)
電池は充電されたのち、発電機から切り離され配電網に適した低い電圧を得るため並列に接続して、電力を供給するのである。ロンドンのチュルシー電気供給会社は、この方法で約40年間も電力供給を行った。
ファラデーが電磁誘導の原理を発見してから半世紀を経たこの当時、交流と変圧器の利用による経済的な送電の可能性を証明し、実現しょうと努力を重ねていた幾人もの研究者たちがいた。フランスのゴーラールとギッブス、ハンガリーのジペルノフスキー、プラーティー、デリなどの技術者たちである。
また、この頃アメリカのウェスチングハウスは交流送電に強い関心を示し、スタンレーの研究を支援し、ウェスチングハウスの電灯プロジェクトの責任者に登用した。イギリスではフェランティも交流配電システムを構築しており、いよいよ交流配電システムは隆盛の兆しを見せてきたのである。
1880年代後半に入ると、エジソンの直流配電システムは交流配電システムからかなり激しい挑戦を受けることになる。いわゆる、電力史上有名な交直送電論争が始まるのである。
それはまず、低電圧の直流と単相の交流の白熱電灯の市場をめぐる競争から始まった。直流をとるか、交流をとるか、電気技術者は大きく二つの陣営に分かれた。直流を支援した人々には、イギリスのケルビン卿、クロンプトン、ホプキンソンなどがおり、これに白熱電灯システムの完成者エジソンが組した。
これに対し、イギリスのフェランティ、ゴードン、トムソン、アメリカのウエスティングハウス、テスラ、スタインメッツらは交流方式を支持した。
直流の支持者たちを挫けさせたのは、送電コストの問題であったが、交流の支持者達にも深刻な問題があった。それは、まだ実用になる交流の電動機がないことだった。もう一つ、交流は直流よりも高い電圧を使うので感電による負傷や死を防ぐために、回路を絶縁したり、アースしたりする必要があることから、この問題の取り組みに対する対策を迫られていたことである。しかしながら、このような差し迫った課題を抱えたために、交流電動機の開発を早め、併せて交流の普及を促進し、交流システムを優位な立場に押し上げていったのである。
交流が使われだした初期の頃の周波数は、高い方は133Hzから低い方は25Hzまで、8種類ほどもの周波数が使われていたが、これは設計者が白熱電球、変圧器、アーク灯、誘導電動機その他の負荷の特性に最もよく適するような周波数を選んだからである。また、これらの装置も進歩し変化したから、周波数はますます混乱する状態にあった。 一方、交流の電灯は、アメリカのハウストンが133Hz付近を使って供給したのが始まりである。133Hzというのは、特にそう計画して決めたのではなく、交流発電機の極数と回転数との関係から、白熱電球のちらつきを減らすために選ばれた周波数である。ところが、1890年以後になると、次第に変圧器や誘導電動機が実用化されるようになり、あまり周波数が大きくては制作が困難になってきた。また、一方では1890年頃から水力発電による長距離送電が始まった。 このことにより、遠方に電力を輸送するには、周波数が高いと電圧降下が大きくなるので、なるべく周波数を低くするような考え方が生じていた。 1895年に、ナイヤガラ滝の施設としてナイヤガラ第1発電所が完成したが、このとき発電所の技師長フォーブスは、周波数を16Hzとする提案をした。しかし、一方でウェスチングハウスの技術者たちは33Hzを望んだ。これらの低い周波数は電力輸送によく適していたのである。結局、二つの中間の周波数である25Hzに決定した。
1900年ごろになると、ウェスチングハウスをはじめとするメーカー、電気事業体は二つの基準にまとまる動きをしめしてきた。送電や大きい電動機に対しては25Hzを供給し、もっと広い目的のシステムのためには60Hzを供給しようというものだった。その後、原動機として高速のタービンが導入されたことは、60Hzへ向かう傾向を加速した。なぜなら、これによって低速の往復蒸気機関のときよりも極数の少ない発電機を使うことができたからである。
ドイツでは周波数の基準化にそれほどの無理はなかった。というのは、低速度の発電機の使用が奨励されていたため、133Hzのような高い周波数をうることは困難だったからである。また、25Hzといった低い周波数に適する回転変流機はまだ広く採用されていなかったからである。結局、ドイツで決まった周波数の基準は50Hzとなった。
イギリスでの事態は相変わらず無秩序のままであった。第1次世界大戦以前の傾向は、多様化へであって標準化へではなかった。ロンドンがこの傾向の先頭に立っていた。たとえば、ニューキャッスルは40Hz、グラスゴーは25Hzというふうに違っていたが、第1次大戦後このままでは不都合が生じるので、統一する法律ができ50Hzを標準周波数とすることになった。
初め、25Hzを選んだわけは送電上の利益があったからであるが、後になっても25Hzが残っていた理由は直流を得るための回転変流機が25Hzでないとよく運転できなかったからである。また、電灯は、100Hzなどの方がよいのであるが、周波数が多いとインピーダンス降下が多くて、長い送電線はもちろん、配電線でも困っていた。このような事情で、中間の50Hz,60Hzに落ち着いたものと考えることができる。